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많이 했던 생각 중 하나는 “이렇게까지 화내지 않으려고 했는데…”였다.
이 글은 완벽한 엄마·아빠가 되려다 지쳤던 한 부모의 이야기이자, 그 과정에서 결국 ‘내려놓음’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된 기록이다.

아이를 키우기 전에는 늘 생각했다. ‘나는 다를 거야.’ 감정적으로 안정된 부모, 아이의 말에 귀 기울여 주는 부모, 퇴근 후에도 웃으며 놀아주는 부모. 책에서, 강연에서, SNS에서 보아온 ‘이상적인 엄마·아빠’의 모습을 하나하나 마음에 새겼다. 그리고 언젠가 아이를 만나면 그 모든 것을 해내는 부모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아이를 안고 처음 집에 돌아오던 날도 또렷이 기억난다. 집 안은 조용했고, 아이의 숨소리만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이 아이에게만큼은 상처를 주지 않는 어른이 되자.’ 그 다짐은 진심이었고, 지금도 변함이 없다.
하지만 현실의 육아는 다짐만으로는 버텨지지 않았다.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순간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완벽한 부모가 되려 애쓰는 과정에서 나는 점점 지쳐갔다. 어느 순간부터는 아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부모로서의 기준’을 맞추기 위해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은 완벽한 엄마·아빠가 되려다 지쳤던 나의 경험과, 결국 내려놓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이유에 대한 기록이다.
완벽한 부모라는 기준이 나를 옥죄다
처음부터 힘들었던 것은 아니다. 아이가 태어나고 몇 달 동안은 모든 것이 새롭고 감격스러웠다. 밤잠을 설치면서도 ‘이 정도는 다들 하는 거잖아’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새벽 수유 후 아이를 다시 눕히고 혼자 부엌에 서서 물 한 잔을 마시던 시간조차, 그때는 이상하게도 버틸 만했다.
문제는 ‘기준’이었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나 자신에게 너무 많은 기준을 세우고 있었다.
아이에게 짜증을 내지 말 것. 항상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할 것. 아이의 감정을 최우선으로 존중할 것. 비교하지 말 것. 화를 내더라도 반드시 이유를 설명하고, 사과할 것.
이 기준들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모두 맞는 말이었다. 문제는 그 기준을 지키지 못했을 때였다.
예를 들어 이런 날이 있었다. 하루 종일 아이와 단둘이 집에 있던 날, 아이는 이유 없이 칭얼거렸고 나는 점점 지쳐갔다. 장난감을 바꿔주고, 책을 읽어주고, 간식을 챙겨줘도 아이의 울음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왜 이렇게 계속 울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 순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했다는 걸.
아이를 재운 뒤,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또 실패했어.’ 아이가 놀란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던 장면이 계속 떠올랐다. 아이에게 상처를 준 것은 아닐지, 나의 감정 폭발이 아이의 마음 어딘가에 남지는 않을지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SNS는 이런 나를 더 옥죄었다. 아이와 웃으며 요리하는 부모, 감정코칭을 완벽하게 해내는 영상, 항상 정돈된 집과 여유로운 일상. 나는 그 장면들을 보며 비교했다. ‘왜 나는 저렇게 못할까.’
특히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밤 11시, 아이를 겨우 재우고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켰을 때였다. 화면 속 부모는 아이에게 화를 내지 않고 차분히 감정을 설명하고 있었다. 나는 그 영상을 보며 감탄과 동시에 깊은 좌절을 느꼈다. 같은 부모인데 왜 이렇게 다를까. 그 비교는 곧 죄책감이 되었고, 죄책감은 다시 더 완벽해져야 한다는 강박으로 이어졌다.
결국 나는 아이 앞에서는 웃고, 아이가 잠들면 무너지는 사람이 되어갔다. 체력은 물론이고 마음의 여유가 사라졌다. 완벽한 부모가 되려는 노력은 어느새 나를 소진시키는 일이 되어 있었다.
지쳤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못했던 시간
가장 힘들었던 점은 ‘내가 지쳤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부모는 원래 힘든 거라고, 이 정도로 힘들다고 말하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단속했다. 주변에서 “다들 그렇게 키워”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더 말문을 닫았다.
어느 날은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집에 돌아와 현관문을 닫자마자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울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냥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도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 정도로 힘들다고 하면 안 돼.’
아이를 사랑한다는 사실과 육아가 힘들다는 사실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데도, 나는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힘들다고 말하는 순간, 아이를 덜 사랑하는 부모가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감정을 눌러 담았다.
그러다 어느 날, 아주 사소한 일에 감정이 터졌다. 아이가 밥을 흘렸다는 이유로, 평소라면 넘길 수 있었을 일에 크게 화를 냈다. 식탁 위에 흩어진 밥알보다, 내 안에 쌓여 있던 피로와 억눌린 감정이 문제였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아이의 숟가락이 멈췄고, 아이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을 보는 순간 나는 알았다. ‘지금 이건 아이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구나.’
그날 밤, 아이가 잠든 뒤 나는 처음으로 솔직하게 생각했다. ‘나 정말 많이 지쳤구나.’ 언제부터 이렇게 숨이 막혔는지, 왜 나는 항상 잘해야만 했는지.
생각해보니 나는 부모가 되기 전부터 ‘잘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살아왔다. 실수하지 않으려고 애썼고, 기대에 부응하려고 노력했다. 회사에서도, 인간관계에서도 그랬다. 육아는 그 성향을 극단으로 밀어붙이는 일이었다.
지쳤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패배가 아니었다. 오히려 나를 살리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하지만 그걸 깨닫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내려놓음이 필요했던 이유, 그리고 달라진 관계
내려놓음은 포기가 아니었다. 내가 내려놓은 것은 ‘완벽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아이 앞에서 항상 침착하지 않아도 괜찮고, 가끔은 화를 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중요한 것은 실수하지 않는 부모가 아니라, 실수 후에 회복할 수 있는 부모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으로 아이에게 제대로 사과했던 날이 기억난다. 화를 낸 뒤, 아이를 안고 눈을 맞추며 말했다. “엄마(아빠)가 많이 피곤해서 화를 냈어. 네가 나빠서가 아니야. 미안해.” 아이는 잠시 나를 보더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짧은 순간에, 나는 관계가 회복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 이후로 나는 감정을 숨기기보다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지금 엄마(아빠)가 너무 피곤해서 잠깐 쉬어야 해.”라고 말하는 연습을 했다. 모든 요구를 즉시 들어주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도 배웠다.
또 하나 내려놓은 것은 타인의 시선이었다. 다른 집과 비교하지 않기로, SNS 속 장면을 기준으로 삼지 않기로 했다. 실제로 SNS를 보는 시간을 줄였고, 아이와 보내는 우리만의 하루를 기준으로 삼기 시작했다.
집이 늘 깨끗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하루쯤은 배달 음식으로 저녁을 해결해도 괜찮았다. 중요한 것은 하루가 끝날 때 아이와 웃으며 "오늘 어땠어"라고 말할 수 있는 여유였다.
내려놓음 이후, 아이와의 관계도 달라졌다. 내가 덜 긴장하니 아이도 덜 예민해졌다. 예전에는 아이의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며 바로잡으려 했다면, 이제는 한 박자 쉬고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육아는 통제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라는 말이 조금은 이해되기 시작했다. 내가 나 자신에게 관대해질수록, 아이에게도 더 따뜻해질 수 있었다.
완벽한 엄마·아빠는 없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비로소 ‘충분히 좋은 부모’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배웠다. 지쳤다면, 내려놓아도 된다. 그것은 아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와 오래 함께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지금 육아에 지쳐 있다면, 꼭 말해주고 싶다. 당신은 이미 충분히 애쓰고 있고,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부모도 사람이고, 사람은 쉬어야 다시 사랑할 수 있다.